해청 김형목

 
강남 부동산 1세대 해청 김형목 (~2003)

강남 부동산 1세대란?
6.25이후 한강 이남의 땅을 사들여 엄청난 부를 얻은 지주들
북한 출신으로 상업이 발달한 개성에서 장사를 하다 전쟁이후 월남한 '개성상인' 들은 전쟁후 남대문시장에서 돈을 벌고나서는 서울의 투자처를 찾느라 분주했다.
온갖 물건들을 팔고, 모은 재산으로 제지업, 방직업, 대부업으로 돈을 벌었다고 함

1960년대 초 강남 부동산에 주목해 강남구 삼성동, 대치동, 압구정동 일대 땅을 사들임
이후 비슷한 형편의 상인들과 공동투자도 함
조합을 만들어 도곡 양재 개포동의 땅을 사들이고 공동명의로 매입해 공동관리 하며 끈끈한 팀워크를 보였고, 60년대 말 정부가 강남 개발을 시작한 시점과 맞물려 엄청난 부를 형성


강남에 꽂힌 이유?
당시 정부가 구 왕실재산과 일본인 재산을 매각해 도시토지개발에 나섰음
강북이 인구나 토지면에서 모두 포화상태였기 때문
그때 (60년대)는 항상 북한의 재침공을 걱정 하던때였는데, 서울 인구가 6.25때보다 두배나 늘었다. 박정희는 또 다시 전쟁이 발발한다면 피란민들을 어떻게 옮길지 고민했고 그결과가 한남대교 착공이었다. 강남 개발은 생각도 없던 시기였음. (군사,피란목적)

63년 박정희 대통령이 취임해 농업중심→중공업중심으로 바꾸며 기반시설 조성을 위해 대도시에 공업용지 및 주택용지를 개발하기 시작. 그러면서 [농지→공업용지or주택용지] 가되며 땅값이 상승

당시 강북의 고급 주택가는 신당동이었는데 평당 3만원이었다, 그런데 한남대교 착공시 신사동 땅값은 평당 200원 정도였다. 압구정은 400원정도, 이때가 짜장면 한그릇에 40원 했을때다. 강남 개발이 거의 마무리되던  79년에 신당동은 평당 50만원, 압구정은 35만원, 신사동은 40만원 하더라. 15년 동안 강북땅은 땅값이 15배 올랐는데, 강남은 2000배 오른것이다.

김형목 이사장은 50~60년도에 제지와 해운 투자로 부를 축적했고, 60년대 초부터 강남 땅을 사들이고, 68년에는 아예 부동산 회사인 '강남개발'을 세움
<종로구에 사는 상인 김형목과 조봉구는 이미 1960년대 초에 강남땅 수십만평을 사모았다. 정부가 강남지역에 많았던 구 왕실재산과 일본인이 버리고간 귀속재산을 평당 100원 전후의 낮은 가격에 처분했기 때문이다. 김형목은 선릉 청담 삼성 대치동등에 약 40만평을 샀다>

왜 샀을까?
그당시에도 정부가 개발에 나서자 땅값이 크게 오른 지역이어서 특혜나 사전정보가 있었다고 의심이 매우 많았다. 그러나 당시 관계자들은 "강남이 개발되고 대박이 터진것은 땅을 사고 10년이 더 지난 일" 이라며 상인의 촉인것 같다고 한다.
실제로 김형목이 샀던 압구정 대치 선릉등 한강이남 지역은 장마때면 쉽게 수해를 입는 지역으로 가치가 없는것으로 알려져 있었고, 정부도 또한 이때문에 싼 가격에 처분했다.
"강남 땅 투기는 70년대는 되어야 나오는 이야기다. 그들이 땅을 산것은 철저히 본인의 판단이었고, 이보다 훨씬 더 이전의 일이다."

부를 쌓아 사회 환원에 나서다
70년대말 강남 땅값이 폭등하자, 주부들이 땅투기에 뛰어들며 강남에 100만여평의 땅을 소유한 김형목은 "특혜가 아니냐"며 비난과 질시의 대상이 됨
그러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지킨 사람이다. 그는 본인 소유의 땅인 청담동과 삼성동부지를 장학회와 서울시에 기증했다.
또한 영동 중학교 , 영동고등학교를 설립해 교육사업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의 세 아들은 각각 강남의 부동산을 물려받아 부동산업외에도 건설업과 서비스업을 하고있다.

개성상인의 특징
어릴적부터 '근검절약' '신용중심' '무차입경영' 이라는 상도를 몸에 익혔다.
회사가 어려울때면 억대의 사적재산을 내놓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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